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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바아의 기록

Ideal_1st
2023-12-19 21:47:18 61 0 0

제일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스승님을 통해 아토락시온에 들어오기 전, 나는 말에게 밟혀 척추가 부러졌었다. 그때 난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눈이 다시 떠지고 낯선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스로를 데키아라고 소개한 그는 내게 새로운 사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상을 검은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사명"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아토락시온의 곳곳을 모두 둘러보고 나니 그 말이 사실임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너무 거대한 사명이어서 견뎌낼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하나하나 적용해보면서 점점 병기를 제작하는 실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때로는 스승님께 병기의 작동 원리에 대해 묻기도 했다. 스승님은 한 명에게만 더 많은 지식을 줄 수 없다고 말했지만, 글라디우스에서 승리할 때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은 우리의 공동 목표를 잊지 않으려면 석판을 만들어서 우리끼리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했다. 화합, 결속, 신뢰, 우정에 대해 떠올리게 해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각각의 석판 중 하나를 담당하여 네개씩 만들기로 했다.


스승님은 각자의 구역에, 자신이 좋아하는 위치에 모두의 석판을 두라고 하셨다. 나는 훗날을 위해 가장 안쪽 구역 앞에 석판을 두었다.


최종 병기를 만들기 위해 지나갈 때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검은 침탈자로부터 피해를 덜 받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수없이 전했지만, 스승님은 내 말을 들어주시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해왔는데도 아직이라니. 이 얘기를 오르에게 털어놓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아주었다.


오르에게 위안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항상 무섭다거나, 괴롭다거나 하는 이유로 내게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겉모습은 굳세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여린 오르. 때때로 그녀를 위한 호수 앞에 앉아있으면, 그녀는 자연스레 내 곁으로 와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곤 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스승님도 내 노력을 알아주실 것이다.


스승님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신 건 한창 내 구역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기운 분산 육면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애먹고 있었는데, 스승님이 조용히 나타나 도움을 주셨다.


그러면서 '바깥으로 나갈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아 특별히 도와주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후부터는 내 질문에 답을 잘 해주실 뿐만 아니라 나만 관심 있어 할 내용까지 상세하게 가르쳐주셨다. 다른 데키마 중에서는 시카만이 스승님의 말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나는 그런 시카가 대견해 보여 따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카는 자신의 병기를 내 병기와 비슷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도가 부족했다. 강력하지만 쉽게 과열되었고, 금세 힘을 잃고 쓰러져버리곤 했다.


내일은 아토락시온을 처음으로 떠나 바아마키아로 간다. 바아마키아... 그곳은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피부가 녹고, 타는 듯한 모래로 발 디딜 수 없는 고통이 극심한 환경이라고 한다. 과연 내가 그 환경을 그대로 옮겨올 수 있을까?


게다가 이제는 새로운 병기도 고안해내야 한다. 지금까지는 내 몸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사람 형태의 병기만을 제작했었다. 하지만 스승님의 말에 따르면 바깥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있다고 한다.


어떤 생명체는 관절이 우리와 반대쪽으로 접히기도 하고, 또 어떤 생명체는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바깥에 나가 제일 처음 본 생명체는 '새'라는 것이었다. 자기 몸뚱이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 마리를 잡아 보니, 그 크기에 비해 상당히 가벼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몸뚱이에서 날개를 수없이 퍼덕일 힘이 나오다니.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사막은 끝이 있는 땅일까? 가면 갈수록 동식물이 보이지 않는다. 가혹한 기후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체들을 참고하여 새로운 병기를 만들 거라 수없이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점점 새하얀 뼈더미만 만나게 되니 자연스럽게 의지가 꺾인다.


간혹 나무그늘 밑에서 만나는 작은 도마뱀들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막여우 하나가 모래 언덕에 납작 엎드려있다. 혹시나 살아있을까 하고 다가갔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떨구었다.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과 고기를 나누어주니 금세 정신을 차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렇게 그 녀석을 떠나보내고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 쯤이었을까...?


녀석과 녀석의 새끼로 보이는 여우들이 나를 뒤따라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어미로 보이는 녀석이 자리에 앉아 나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이 여우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아차렸다. 배가 고픈 것이었다. 내가 음식을 꺼내들자, 새끼여우들이 내 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음식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만약 이 녀석들이 여행이 끝나도록 따라온다면, 아토락시온으로 데려가 볼 생각이다.


난  여기... 바아마키아와 똑같은, 아토락시온에 작은 바아마키아를 만들거니까! 이 녀석들을 데려가도 거기서 잘 적응하지 않을까?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처음으로 만난 도시에서는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도구를 이용하고 있었다. 특히 선로를 이용하여 물자를 빠르게 옮기는 것이 정말 장관이었다.


'손을 쓰지 않고도 병기의 성능을 자동적으로 실험할 수 있다면, 병기를 제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의 머릿속에는 빠르게 설계도가 그려져 나갔다. 두 줄의 선로를 타고 이동하는 카이벨란 육면체. 그리고 그 육면체들로부터 검은 침탈자의 흔적을 감지하여 동작과 정지를 반복하는 병기들. 이 생각이 실현된다면, 바아마키아 안에서는 병기를 제작하자마자 오작동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병기 제작에만 전념할 수 있겠지. 스승님과 오르, 시카, 요루도 좋아할 것이다.


모두가 다시 아토락시온에 모였다. 나는 선로를 보았던 경험과 함께 내가 고안한 장치에 대해 설명했다. 다른 데키마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카이벨란 육면체가 이미 아토락시온 곳곳에 설치되었는데 왜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나는 스스로 선로를 설계하고, 카이벨란 육면체가 선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개조하기로 했다. 다른 데키마들은 아마 지금쯤 새로운 병기들을 만들어내고 있겠지. 하지만 이 작업이 끝나고 나면 이 선로가 얼마나 유용한 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아마 다른 데키마들도 앞다투어 이걸 설치하려고 하겠지.


카이벨란 육면체 수송 체계가 완성되었다. 막상 선로를 완성하고 나니 사람도 운반할 수 있는 장치가 있으면 더욱 편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선로를 만드려면 너무 많은 공간이 필요해서 병기를 만들 공간까지 부족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스승님이 남긴 교본에서 원반 형태의 수송 장치 설계도를 찾은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존과 달리 선로에 의존할 필요도 없고, 사람을 싣고 움직이기에도 충분한 넓이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글라디우스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스승님의 기록에 남아있는 이 장치를 먼저 만들기로 했다.


병기는 그 이후에 만들어도 된다. 이 체계만 탄탄하게 잡힌다면, 그 이후부터는 시간에 덜 쫓길 수 있다.


바깥으로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오르는 내가 무얼 하는지 궁금하다며 바아마키아에 자주 오곤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통 바아마키아로 오지 않는 데다가 표정도 멍든 달 같다.


그 이유에 대해 묻기만 하면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버린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걱정된다. 오르가 방문했던 오르제키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루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오르를 바라보는 것을 보아서는 아직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것 같다. 오르가 걱정을 놓을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고 싶지만,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를 믿어준 스승님을 두고 다른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 때가 되면 오르는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항상 함께했던 친구니까.


요루와 오르가 자신의 구역으로 가고 나자, 시카가 말했다. 나를 따로 보자고 하다니 별 일이라고 생각했다. 데키아가 기다리고 있으니 짧게 말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너 그거 알아? 오르는 변절자야. 아토락시온에 재앙을 가져올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오르의 낙원에 가서 직접 두 눈으로 보라고 말했다. 그곳에 검은 여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의 석상이 생겼다며.


밖에 나가기 직전에 스승님이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세상을 구원해 줄 신 같은건 없다고. 신이 존재하며 신의 의지대로 세상이 흘러간다고 믿는 건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신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신을 믿는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약해졌다는 뜻이라고...


하지만 의아했다. 데키아에게 오르의 변절을 고하여 벌을 받게 할 것이지, 왜 내게 말한 걸까. 시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바깥에서 돌아온 후부터 짓기 시작한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나는 달이 바아마키아의 심장을 지나는 시간 이후로 내 구역을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시카의 말을 들은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눈 앞에 나타난 오르의 구역 곳곳에 검은 여신상이 가득했다. 뒤를 돌아보니 오르는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시카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왜 우냐는 물음에 그녀는 이내 숨겨왔던 말을 털어놓았다.


"널 위해 견뎠어."


그제야 책상 위의 양피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병기를 역설계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는 데다가, 거기에는 시카의 글씨체로 더 많은 걸 알아오라고 적혀있기까지 했다.


"내 기술을 시카에게 주지 않으려고 그런 선택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르를 비난할 수 없었다. 시카가 오르를 이용한 것이었다. 일단은 오르를 안심시켜야 한다.


"괜찮아. 이제는 숨기지 않아도 돼."


내 말을 듣고 오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게 서서히 다가와 안겼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인데도 이용하려고 하다니. 언젠가부터 시카의 성격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그를 멀리하고, 오르를 지켜줘야 한다.


시카가 데키마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카를 제외한 다른 데키마들의 신뢰는 여전히 끈끈해 보인다.


하지만 시카가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비록 시카와의 관계가 균열 위에 세워진 첨탑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지라도 모두가 하늘을 향해 마지막까지 손을 뻗어야만 한다.


한 명이라도 포기하면 스승님을 포함한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그러니 나는 더욱 연구에 몰두해서 더 강력한 병기를…


시카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지막 글라디우스는 개최하지도 못하고 중단되어버렸다. 데키아는 시카가 외부에서만 구할 수 있는 병기 재료를 수급하러 나갔다고 하며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르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뿐 말이 없었다.


결전의 날, 나는 평생을 지켜온 신념에 따라 병기 군단을 지휘했다. 다시 나온 바깥에는 스승님의 말대로 검은 침탈자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침탈자들에 씌여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글라디우스가 열리지 않았으니 10만 아토르도 없다. 검은 침탈자와의 싸움은 점점 버거워져만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이들의 병기가 보이지 않았다. 시카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지? 요루는?


오르는 어째서 병기들을 보내지 않았지? 결전의 날에 보자고 약속했던 것을 잊었나? 그렇다면 그동안 내게 해왔던 말은?


모두들 멸망을 원하지는 않을 텐데 어째서? 어째서!


아토르 군단 없이 혼자 검은 침탈자를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검은 침탈자들에게 밀려 아토락시온에 돌아와 보니, 이곳의 동력을 유지해주던 검은돌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데키아 또한 기억을 잃은 채, 아토락시온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곧이어 오르와 요루가 나타났고, 시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병기를 이끌고 돌아왔다. 시카는 자신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승님을 배신하고 먼저 떠난 게 누구던가? 혹시 검은 돌이 사라지고, 데키아가 기억을 잃은 것 역시 시카의 짓은 아닐까?


내 생각을 입 밖에 꺼내자마자 시카는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동시에 그는 오르를 지목했다.


"아무튼, 이건 오르가 범인이야! 신을 멀리하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한다고 경고했었잖아! 내 말을 왜 안 들어주는 거야!"


그 말에 오르는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요루도 아무 반박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오르를 변호했다.

"아냐! 오르에게는 스승님도, 데키아도 꼭 필요해!"


그러자 시카도 요루도 의문스러운 표정을 띤 채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여신에게 아토르 군단을 바쳐야 하니까, 마지막 글라디우스가 열려야 한다고! 그러니까 데키아의 기억이나 검은돌이 사라진 것에 오르는 관련 없어!"

그러자 요루가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그러면 답 나왔네. 바아 네가 침탈자들에게 진 책임을 우리한테 돌리려고 그러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나 혼자만이 병기들을 이끌고 나갔는데 내 책임이라니.


그때 시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지금까지 매번 승리만 하다가 처음으로 패배해보니 어때? 나도 그 기분 알아.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검은돌을 제자리에 돌려놔. 나도 지금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잖아!"


머리가 아찔했다. 내 입장을 이해해주는 이가 없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오르..!"


그러나 오르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의 결백을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이,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애써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의 마음 속에 자리한 검은 여신이었어. 그렇지?"


오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릴 뿐. 내면에 쌓인 분노를 멈출 길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칼을 꺼내들어 내 반대편에 서 있는 오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시카와 요루가 당황하며, 나를 향해 그만 두라고 외쳤다.


시카와 함께 온 병기가 반응하기도 전에, 칼이 공기를 가르고 정확한 중심에 꽂혔다.


다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칼이 깊숙히 박힌 타리브레의 문은 그대로 작동을 멈췄다.


"너희와 함께 침탈자를 물리칠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같이 죽는 편을 택하겠어."


나는 검을 뽑아들고 바아마키아 일지를 전부 찢어버렸다. 다른 데키마들을 돕겠다는 생각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내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원망하고 탓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아마키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과거의 흔적을 지워도 감정이 좀체 사그라들지 않는다. 시카와 요루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오르는 내게도 약속했었다. 분명, 함께 병기 군단을 이끌고 검은 침탈자들에게 맞서겠다고..!


오르가 왜 검은 침탈자들을 방관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검은 여신을 숭배하는 건 알았지만, 우리 둘의 약속까지 지키지 않아야만 할 이유가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나는 오르가 건네준 증표와 편지를 구석에 던져버렸다. 이제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버릴 지도 모르겠다. 점점 주변 사물들이 내게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검은 침탈자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 나는 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지?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어쩌면 나는 실패로부터 도피하려고 바아마키아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모든 이들이 나와 스승님을 등졌지만, 나마저 이 의무로부터 도망간다면 정말 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검은 침탈자와 맞섰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니...


내가 사랑했던 이의 모습을 본떠 만든 루크레시아를 바라보았다. 우르키오스의 등 위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슬픈 미소가 슬쩍 보인 것도 같다. 시간을 되돌려서 오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멈춰만 있을 수는 없다. 기억을 잃어버린 데키아가 다시 한 번 아토락시온을 완성할 때까지 우리도 버텨야만 한다. 그것만이 잘못을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카이브를 만들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스승님이 그리하겠다고 하였듯이, 우리도 때가 되었을 때 다시 깨어나 검은 침탈자를 막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었다.


어쩌면 스승님이 만들었던 카이벨란 육면체를 응용하여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내용을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카이벨란 육면체를 약간이나마 개조를 해 본 경험이 있다. 설사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을 이행할 마지막 방법이니까.


생각이 정리되자 계획이 차례차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다른 데키마들을 설득해야 한다. 나 혼자서는 이뤄낼 수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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